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문단 편집) === [[삼두정치]] === 기원전 62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을 멸망시키고 [[하스몬 왕조]]를 복속시키는 등 지중해 동방에 대한 로마의 패권을 확고하게 다진 폼페이우스가 로마로 귀환했다. 그는 대규모 [[개선식]]을 거행한 뒤 원로원에 자신을 따라 전장에서 활약하고 퇴역하는 군인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자신이 동방에서 실시한 정책을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위세가 지나치게 강하다고 여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소 카토]],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등이 이를 막아섰는데, 크라수스 역시 폼페이우스 반대 세력을 지원했다. 이로 인해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은 좀처럼 땅을 받지 못했고, 폼페이우스가 취한 정책 역시 승인받지 못했다. 한편, 크라수스는 [[징세청부업자]]의 속주세 예납제 폐지를 추진했다. 당시 로마 당국은 가장 많은 금액을 제시한 징세청부업자에게 그 만큼의 속주세를 거둬들일 권한을 주는 방식으로 속주세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가뭄, 전쟁 등 예상치 못한 악재로 인해 세금이 그 만큼 거둬지지 않으면 남은 금액을 자기 돈으로 충당해야 했고, 그렇다고 악착같이 징세했다간 현지인들의 불만이 폭발해 로마에 고발이 들어가거나 폭동이 일어나버리면 그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징세청부업을 맡는 에퀴테스를 대표하던 크라수스는 이 예납제를 폐지해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과도한 세금 수취의 필요가 없으니 속주민들에게도 더 좋다는 논리를 제시하며 예납제 폐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법안 통과를 막은 의원들이 크라수스 역시 경계해 이를 막았고, 크라수스는 원로원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기원전 6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먼 히스파니아 총독을 수행한 후 로마로 귀환했다. 카이사르는 루시타니아(오늘날 [[포르투갈]]) 지역을 제패하는 군사적 업적을 세웠기에 개선식을 거행하고 싶었지만, 원로원이 집정관 후보 등록과 개선식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하자 개선식을 포기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집정관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와 접촉해, 자신이 집정관이 되면 그가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크라수스까지 끌어들이면서, 제1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었다. 다만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서로를 질시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양쪽을 오가며 합의를 이뤄내야 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59년 폼페이우스 추종자들의 투표와 크라수스의 자금에 힘입어 집정관에 당선된 카이사르는 약속대로 폼페이우스가 동방에서 행한 정책을 승인하고 농지법을 도입했다. 크라수스는 농지 분배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징세청부업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임대료를 1/3으로 인하하기로 했다. 이에 만족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연말에 갈리아 키살피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그리고 일리리아 속주를 총독으로서 5년간 통치하도록 보장했다. 이후 기원전 58년 폼페이우스의 부관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장인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58년 집정관)|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집정관에 선임되어 삼두의 이권을 보장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에 착수했고,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반목하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에 대항하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견제하기 위해 클로디우스에 추방당한 키케로를 복귀시켰다. 이에 앙심을 품은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의 집을 포위하고 돌을 던지거나 연단에 서서 연설하던 폼페이우스를 향해 야유를 퍼붓는 등 온갖 공격을 퍼부었다. 이때 클로디우스 추종자들은 폼페이우스에게 야유를 퍼부으면서 "동방을 맡아야 할 자는 누구인가? 크라수스!"라는 구호를 외쳤다. 폼페이우스는 이 말을 듣고 크라수스가 클로디우스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했다. 키케로는 친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보낸 서신에서 폼페이우스가 자신에게 "크라수스가 나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고백했으며, 몇 달간 시골에 내려가서 경호원들의 철통 호위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크라수스로부터 막대한 후원을 받고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카이사르를 계속 지원할 필요성을 의심했다고 덧붙였다.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도 로마의 정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이 상황을 내버려뒀다가는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겠다고 염려했다. 그의 염려는 기원전 5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표명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54년 집정관)|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카이사르의 [[임페리움]]을 회수하고 집정관 시절에 저지른 불법 행위를 고발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카이사르는 아헤노바르부스의 당선을 저지하고 삼두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회담을 갖기로 했다. 기원전 56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는 [[루카 회담]]을 가졌다.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루카에 방문한 이들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외에도 르디니아 총독 아피우스, 히스파니아 총독 네포스를 포함하여 120명의 [[릭토르]]와 2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이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방문자들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요청에 따라 루카에 찾아왔다고 밝혔다. 세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고대 사료에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는 그들이 루카에서 아래의 합의에 도달했다고 기술했다. >1.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다. >2. 카이사르는 두 사람의 당선을 위해 군인들을 민간인 신분으로서 로마로 보내 투표하도록 한다. >3.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의 임기를 5년 연장한다. >4. 폼페이우스는 임기를 마친 뒤 히스파니아 총독에 선임되고, 크라수스는 시리아 총독을 맡는다. 루카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몇 달 동안 회담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세간에서 두 사람이 루카에서 카이사르와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떠돌자. 현직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는 원로원 회의에서 두 사람에게 "세간에 당신들이 카이사르와 짜고 집정관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정말로 집정관이 되고 싶은가?"라고 대놓고 물었다. 폼페이우스는 [[옵티마테스]] 때문이 아니라 선동을 일삼는 자들 때문에 로마의 정세가 불안하니 집정관을 맡아야 한다면 맡겠다고 답했다. 반면에 크라수스는 자신은 카이사르와 짜고 집정관으로 지명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두 사람은 기원전 56년 가을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비로소 속내를 드러냈다. 마르켈리누스는 이에 격분해 두 사람의 출마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두 사람은 호민관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소 카토]]의 먼 친척으로, 소 카토와는 달리 삼두정치파였다.]를 회유하여 선거를 마르켈리누스가 퇴임한 후인 기원전 55년 1월로 미루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했다. 마르켈리누스는 "이것은 공화정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다!"라며 공개적으로 항의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당대 최강의 거물인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출마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잇따라 사퇴했지만, 아헤노바르부스는 [[소 카토]] 등의 격려에 힘입어 선거 유세를 이어가기로 했다. 많은 로마인들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밀실에서 집정관 자리를 거래했다고 분개하며 아헤노바르부스를 지지했다. 이윽고 투표일에 카이사르가 보낸 병사들이 로마에 대거 밀려들어왔다. 아헤노바르부스 및 옵티마테스 파벌 추종자들은 이에 맞서 무리를 결성했다. 곧 두 무리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더니 투표장이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루키우스 안니우스라는 의원의 얼굴을 짓밟아 피투성이가 되게 만들고 의원들을 몰아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아헤노바르부스를 칼로 내리쳤고, 사람들은 이에 기겁하여 도주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갔고, 다른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피묻은 옷을 집으로 가져왔다. 당시 임신 중이던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딸)|율리아]]는 이 옷을 보고 폼페이우스가 죽은 줄 알고 놀라 유산했다. 이후 기원전 55년 2월로 미뤄진 투표 결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두 사람은 루카 회담에서 정한 대로 정책을 단행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굴욕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며 이를 허용했다. 이리하여 흔들리는 듯했던 삼두는 다시 굳건해졌지만, 크라수스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 버금가거나 능가할 군사적 위업을 확보함으로서 입지를 완벽하게 구축하기로 마음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